아픔 한 조각

예수회 신부인 월터 취제크(Walter J. Ciszek, 1904-1984)는 구소련 선교를 위해 이주노동 자로 위장해 잠입했으나,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루비안카 감옥에서 5년간 취조를 받은 뒤,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Gulag, 굴락)에서 15년 동안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강제 노동을 견뎠다.
그러나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를 하며 신부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1955년, 15년의 형기를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여전히 감시와 통제 속에서 사목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강제노동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그러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매일 드러난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신 사람들, 장소, 환경이 곧 하나님의 뜻이 다.
하루 24시간의 삶 자체가 그분의 뜻이다.

이 깨달음은 고통 속에서 그의 삶을 더 깊이 변화시켰고, 어떤 난관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였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물었다.
“이 사람이 눈먼 채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예수님께 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 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그분은 흙에 침을 섞어 진흙을 만들어 그의 눈에 바르신 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 사람이 말씀대로 실로암 못에서 씻자, 눈이 떠졌다(요한복음 9:1-41).

구약에서는 고통을 개인이나 조상의 죄에 대한 징벌로 여기거나 신비로운 정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고통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해 이해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고통을 겪으셨고, 우리의 아픔을 함께하시며,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다.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이 눈을 뜬 사람에게 따져 물었다.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가?”
그는 대답했다.
“예수라는 분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했고,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삶은 변화된다.
소망이 없던 사람도 진실하고 온전하며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치유는 일어나고 있으며,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시선을 바로 잡아야 한다.
고난을 겪거나 신체적, 환경적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를 대신해 고난을 짊어진 존재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위로하고 사랑함으로 돕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은 단순히 자선이나 동정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의 일부를 다하는 것이다(고전 12:12-31).

나의 아픔이 세상의 수많은 아픔의 한 조각임을 깨닫고 나의 기쁨이 누군가의 기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줍니다.
(신영복, 『처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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