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크랜턴(Wi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은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졸업하고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원했다. 당시 일본에서 선교 중이던 매클레이 선교사가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허락을 받고 조선 선교를 위한 교사와 의사를 찾고있었다.마침매클레이와 함께활동하던 해리스 선교사가 안식년 중미국에머무는동안 윌리엄 스크랜턴에게 조선 선교를 권유했다. “윌리엄, 조선에 선교의 문이 열렸다. 그곳이 당신이 같이 가서선교를 했으면 좋겠다.” 그 제안을 받고 고민하던 중에 스크랜턴은 장티푸스에 합병증으로 위독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면 아프리카가아닌 아시아로 선교를 가자”고 함께 기도했다. 결국 그는 아내와 두 .살 배기 딸, 그리고 어머니메리,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1885년 요코하마를 거쳐 조선에 도착했다. 감리회 해외선교부는윌리엄을 의료 선교사로, 아펜젤러를 남자 교육 선교사로, 메리스크랜턴을 여자 교육 선교사로조선에 파송하였다.

서울에입성한 윌리엄 스크랜턴은 제중원의 알렌을 도와 일하다가 정동의 의사택을 개조하여 정동병원을 시작했고, 1887년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ㅎ사받았다. 또한 여성들을 위한 의료 기관인 ‘보구녀관’을 설립하였다.민중이 있는 곳어그는병원이 있어야 한다”는 소명을 따라 서민이 접근하기 쉬운 애오개(현 아현교회), 상동(현 상동교회), 동대문 지역(현 동대문교회) 등지에 시약소를 세우며 선교 의료의 외연을 확장하였다. 정동병원은 이후 상동으로 이전되었고자리에 세워진 상동교회는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전덕기, 신석구, 이준 등의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특히 전덕기는 상동교회 담임목사로서 항일운동과 신민회 조직 등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메리 스크랜턴(Mary_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1909)은 40세에 남편과 사별하고,53세에 아들과 함께 조선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녀는 조선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우고 여성 평등과 교육과 복음 전도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75세까지 현장에서 사역하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번 미주연회에서 정희수 감독(미연합감리교회 오하이오 연회)은 오하이오 연회의 교회들과한국 감리교선교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소개하였다. 클리블랜드 지역 교회들은 정동 땅 매입을위한 기금을 보냈고, 보구녀관 건립에도 볼드원 가족의 재정 후원이 있었다. 초기 명칭은 볼드원예배당’이었으며 후에 동대문교회로 발전하였다. 김활란, 김옥길 여사도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유학했으며, 의료선교사인 알렌도 오하이오 출신이었다

.정 감독은 오하이오 연회에 속한 교회들을 방문할 때마다 140년 전 여러분이 조선 땅에 뿌씨앗이 지금의 한국 교회라는 열매로 맺어졌고, 저또한그 열매 중 하나로서 감독으로 섬기린고고,있다’며 자긍심을 심어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는 그들의 헌신과 희생 앞에 큰 빛을 지사는 사랍들 이라며, 이것이 우리가 오늘 선교해야 하는 이유라고 역설했다. 정 감독은 “한순간도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으로,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선교적 사명을일깨운다. 선교적 사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삶의 작은 부분을 선교지에드리고,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선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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