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자치연회 감독이취임식을 위해 볼티모어를 방문했다(11/18-20). 취임식을 마치고 권덕이 감독과 이경환 총무와 함께 볼티모어에서 140마일 떨어진 펜실베니아 주 벅스 카운티에 위치한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의 고향인 수더튼(Souderton)을 방문했다. 먼저 아펜젤러가 다녔던 Immanuel Leidy’s Church의 공동묘역에 있는 아펜젤러 가족 묘역에 세워진 아펜젤러 순직기 념비(2021년)를 찾아 헌화했다. 이곳에는 아펜젤러의 부모와 형제들이 묻혀 있다.
아펜젤러는 1902년 한국어 성경번역을 위해 타고 가던 배가 충돌사고로 어청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면서 순직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하고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가묘가 만들어졌다
라이디스 교회
아펜젤러가 태어난 1858년에 세워진 교회를 둘러보았다. 이 교회에서 아펜젤러는 신앙생활을 하며 선교사의 꿈을 카웠을 것이다. 교회는 늘어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리모델링을 거듭하다 2016년 길 건너 들에게 아펜젤러에 대해 알리고 선교정신과 삶의 태도를 갖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30,40여 곳에 편약 3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더넓은 땅을 구입하여 새롭게 건축하고 이전을 했다.
이 교회에 서 35년을 목회하고 은퇴한 존 니더하우스 목사는 한국에서 감리교회가 부흥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20년을 목회하기까지 한국에 복음을 전해준 아펜젤러의 존재를 몰랐다고 했다.
그후 한국 목회자의 방문을 통해 아펜젤러의 일대기를 듣고 매우 놀랐으며, 추수감사절 예배를 통해 교인 선교사를 보내고 자원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현재는 28명의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있는 것 울 선교현황판을 통해 볼 수 있었다.
교회로부터 1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아펜젤러 생가를 방문했다. 생가를 둘러보며 어린시절 교회를 오가던, 그리고 조선에 선교사로 떠나기 전고 별설교를 했던 목사님을 떠올려보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집 주인 로젠버그 씨는 1980년대 후 반 대니얼 데이비스라는 사람이 아펜젤러 관련 논문을 쓰기 위해 방문해서, 이곳이 아펜젤러 선교사가 태어난 곳이라고 말해 주어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2015년 박대성 목사(베다니 한인연합감리교회)가 생가를 찾아내어 한국 교회에 소개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제물포에 상륙했다.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넘겼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무덤의 빗장을 산산이 부수고 부활한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어 있는 글제을 끊고 그 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최초의 복음 선교사 본이 뿌린 씨가 오늘의 한국교회 성장의 기초가 되었다. 아펜젤러는 정동교회와 배재학당을 육원 교육 과 선교에 힘을 썼고, 한국어 성경번역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아들 헨리 다시 이젤러는 1917년 한국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배재학당 교장으로 취임해 교육에 헌신하는 20년을 사역했으며,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현 이화여대)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한국을 사랑한 한국인의 좋은 친구 아펜젤러는 44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를 통해 한국감리교회가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아펜젤러는 고향에서 조차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지만, 한국 땅과 한국인들의 영혼에 심겨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우리들 또한 복음에 빚진 자로서 한알의 밀알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