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칼럼

  • 교회가 사람들의 고향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트럼프 정부의 이민세관단속국(ICE)에 의한 대규모 불법 이민자 단속과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력과 방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LA 다운타운이 봉쇄되자 시위대는 한인 타운으로 향했고, 1992년 4.29 폭동의 상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단순한 뉴스가 아니었다. 그 시절, 한인들은 총기를 들고 가게를 지켜야 했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보호받을 길도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물리적 피해는 없었지 만, 마음 깊은 곳의 불안과 상처는 여전하다.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신분 문제로 인해 여전히 두려움 속에 지내야 하는 이들의 고통과 침묵이 눈에 밟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며칠 전, 부흥회 강사로 오실 김기석 목사님께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LA 상황을 보며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별일 없으신지요?
    교민들도 많이 불안하시겠습 니다. 어려운 시절입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고향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문장을 읽으 며, 전날 새벽기도회에서 전한 말씀의 제목이 떠올랐다. “교회는 지금 피난처인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도피성에 대한 묵상을 나누며,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두려움 속에 있는 이들의 피난처’가 될 수 있을지를 물었다. 그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트럼프 정부의 이민자 단속은 단지 ‘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리 곳곳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참혹하다.
    공장과 세차장, 농장, 식당 등에서 붙잡혀 끌려가는 사람들, 헤어진 가족들, 체포를 피하기 위해 숨어 있는 이들. 법은 지켜졌을지 몰라도 사람은 무너졌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요한복음 8장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했다. 간음 중에 붙잡힌 여인을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데려와 물었다. “이 여인은 율법대로 돌로 쳐야 마땅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정의와 자비가 충돌하는 순간, 그들은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돌을 들었고, 예수님은 몸을 굽혀 땅에 글을 쓰셨다. 그 침묵은 단지 말이 없는 시간이 아니라, 모두가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을 부정하지 않으셨지만, 그율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도구가 될 때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했지만 강력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사람 들이 하나둘씩 떠난 후,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예수님의 대응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가, 아니면 짓누르는가?

    트럼프 정부의 단속은 ‘불법’을 근거로 사람을 배제했다. 법은 따랐지만, 자비가 없었고, 존엄은 무시되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규정을 아셨지만, 그 법이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시간과 공간을 벌어주셨다. 오늘도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람, 신분이 해결되지 않은 이민자, … 실수한 사람,들을 향해 돌을 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돌을 들고 있는가, 아니면 땅에 글을 쓰고 있는가?”

    진정한 정의는 사람을 살리는 정의이다. 정의는 사랑을 입어야 하고, 사랑은 정의를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의 손안에서 정의와 사랑은 분리되지 않았다. 그분의 손은 돌을 들지 않고, 흙 위에 조용히 글을 쓰며 사람을 살리는 손이었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손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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